여러 ‘호모’ 가운데 요즘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는 ‘호모’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일 법하다. 미국 월가의 데모대가 내뱉은 욕설이 결국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만든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닌가. 애덤 스미스 이래로 경제학과 인간 삶·사회를 지배한 것으로 간주된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이기심과 합리성으로 똘똘 뭉친 냉혈한이다.

<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대림북스)의 저자 요하네스 발라허 독일 뮌헨 철학대 총장은 같은 맥락에서, 즉 방법적 개인주의와 사적인 이익이란 가설에 기반을 둔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비판한다. 고찰의 출발점은 방법적 개인주의에 따라 개별 행위자와 그들의 결정이다. 경제행위나 시장에서의 결과는 물론이고 사회적 현상까지 모두 개개인에 의한 수많은 개별 결정의 결과로 여겨진다. 사적인 이익은 이익의 극대화라는 원칙이다. 경제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사람은 누구나 이익을 최대한 많이 창출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현실의 인간은 어떤 때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이지만 어떤 때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리고 시장은 나와 상대를 모두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파악하도록 강요했고 이러한 부정확한 인식 또는 사실과 인식 간의 간극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적인 세상에 대한 반성이 그렇다고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살해로 귀결해야 함은 아니다. 이 책을 포함해 행복학 관련 서적에서 자주 거론되는 부탄의 ‘국민총행복(GNH)’이 국내총생산(GDP)을 대체할 수는 없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넘어서야 하듯 GDP도 넘어서야 한다.

책에서 실행한 최후통첩게임은 함의가 적지 않다. 특히 기득권 계급에 더 교훈을 준다고 볼 수 있다. A와 B라는 두 사람에게 100유로를 어떻게 나눌지 실험했다. A는 어떤 비율로 나눌지 제안하고 B는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다. 만일 B가 거절하면 A와 B 모두 한 푼도 못 받는다. 따라서 선택권이 없는 B로서는 조금이라도 건지는 게 이익이기 때문에 어떤 비율이 제시돼도 수락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예상이다. 실험결과 A가 B에게 20%(20유로) 이하를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 제안이 거절당할 확률은 40~60%나 됐다.

효용 또는 이익만으로 인간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단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응당 대안이 마련돼야 하는데, 저자는 ‘스턴 보고서’로 유명한 니콜라스 스턴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 등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검토한다. 그중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의 5가지 기본자유 구상, 즉 ‘시장기회’ ‘사회보장’ ‘사회적 기회’ ‘정치적 참여권’ ‘투명성 보장’에 지면을 많이 할애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관한 논의도 빼놓을 수는 없다. 아쉬움이 없지 않다. 마지막 장의 제목을 “왜 우리 자신에게 달렸는가”로 정한 것은 본질적인 통찰과 미진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대부분 스스로 원해서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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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