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대한 한국 언론의 반응은 나로서는 기이한 것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스티브 잡스는 성공한 사업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게 평소 나의 지론이었다. 1년전쯤 출간된 <스티브 잡스 무한혁신의 비밀>란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나는 스티브 잡스를 냉정하게 평한 적이 있다.

“(스티브 잡스는 빌 게이츠와 마찬가지로) 창의적이지 않은데 창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이 매우 성공한 기업가라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뿐이다. <스티브 잡스 무한혁신의 비밀>에서 주장하듯, 그가 세상을 바꿨다는 견해에도 적잖은 과장이 들어 있다. 솔직히 그는 애플을 바꿨을 뿐이다.”




그러니 교황이 죽은 것 이상으로 지구촌에 도도한 애도의 물결이 넘실대는 광경이란 납득하기 힘들 수밖에. 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 고인을 욕하지 않는 게 우리네 정서인데다, 굳이 그 죽음에 왈가왈부할 만큼 스티브 잡스에게 애정이 없어 그러려니 지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대학생들 중 누군가가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과도하게 찬양 일변도 반응을 보이자 핀잔을 주는 정도로 불편함을 약간만 드러냈다.


오늘자 신문에 마침내 내 생각과 비슷한 기사를 발견했다. “에디슨ㆍ라이트형제보다는 못해”라는 제목의 10월10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미 언론의 냉정한 평가를 다뤘다. 당연하다. 내가 쓴 서평을 다시 인용한다. “1996년 (애플로) 복귀한 잡스는 ‘복귀 이후 3188%의 경이적인 산업조정수익률을 이룩해’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CEO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창의는 시가총액, 수익률 등과 관련된 창의이다. 그가 꿈꾸고 바꾼 세상은 극언하면 애플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데 관련됐다.”


한마디로 스티브 잡스는 열정을 품은 혁신가라기보다는 돈에 밝은 탁월한 사업가이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너무 하다는 반론이 들어올까. 사람들이 하기 좋아하는 말로 만일 스티브 잡스가 없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극언하면 소위 스티브 잡스의 혁신이란 것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달려가는 파도에 보드 하나를 얹은 데 불과하다. 서퍼가 하나였다면 보드 하나를 얹은 공로를 인정해야겠지만 스티브 잡스가 놀던 동네에는 너무 많은 서퍼들이 있었고, 있다. 빌 게이츠가 그랬듯 스티브 잡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저기 큰 파도 오네”라고 바다 쪽을 가리키자 보드를 서둘러 들고 달렸을 뿐이다.


욕먹을 작정하고 마저 얘기하자면 스티브 잡스가 속하고 도모한 세상은 99%를 지배하고 착취하며 이익을 취하는 1%의 세상이었다. 세계 언론을 상대로 청바지 입고 폼 나게 발표하는 스티브 잡스보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원주민들을 위해 우물을 파줬을 내가 이름을 모르는 어느 미국인 청년이 더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 청년이 스티브 잡스와 대비를 이루기 위해 꼭 미국인인 필요는 없다. 시리아인일 수도, 한국인일 수도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데 국적은 어느덧 잊히기 마련이다. 자본에도 국적은 망각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의 패권에서는 국가주의가 온존하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자본에 대한 미국의 패권이야말로 스티브 잡스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깊숙이 관여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민자의 자식이지만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며 미국적인 가치에 평생을 헌신했다. 마가렛 대처가 여성이지만 여성이라고 하기 힘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남성화한 여성이 더 남성적이듯 미국화한 이주자 정신은 더 미국적일 수 있다.

이쯤에서 만약 자본, 패권 같은 용어가 불편하다면 스티브 잡스를 좀 멋있게 돈을 많이 번 유명한 미국인 사업가쯤으로 정리하면 어떨까.


아이패드라는 이른바 혁신보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내걸고 99%의 정체성을 복원한 무명 미국인들의 행동이 나에게는 더 감동적이다. 스티브 잡스에 젊은이들이 열광한 데는 아마도 그가 갖고 있는 원초적 ‘1% 지향성’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산술적으로 100명중 99명은 99%일 수밖에 없는데도 100명 중 100명 모두가 1%일 수 있다고 믿는 주술을 깨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다. 진정한 혁신은 장난감 하나를 던져주고 천문학적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희생을 감수한 행동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소장/eriss.tistory.com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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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