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나라 일본 열도의 대재앙에 한국인들은 진심으로 애도하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보편적 인류애가 꽃피는 모습이, 대참사만 아니었다면 봄꽃만큼이나 아름다웠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말라’고 했다. 혹여 한일 양국의 특수한 역사적 갈등에 기인해 재앙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철부지 행동이 있다면 지탄을 받게 될 것이고 실제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더 특수하게’ 특정한 종교적 입장에 근거해 타인의 고통을 조롱한 듯한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발언에 대해서도 비난이 봇물을 이뤘다. 물론 ‘이교도를 징벌하는 하나님’이란, 신에 대한 그 목사의 견해를 지지하는 개신교도들이 일부 없지는 않겠지만 국민 대다수는 ‘정신병자’라는 직격탄을 퍼부은 어느 진보 논객의 독설에 더 공감하고 있다. 고통을 조롱하는 것은 어떤 대의명분 아래서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님 정신병자’ 논란 말고 일본의 대재앙과 관련해 빈번하게 등장하는 화젯거리는 일본인들의 시민정신이다. ‘메이와쿠 가케루나(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정신이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목사님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할지 모르겠으나, 언론은 찬양일색이다.
사실 그럴 만하다. 지진의 참화 속에서 일본인들이 보인 성숙한 시민정신은 두고두고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핵발전소 관리는 낙제점일지 몰라도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딜레마 게임’은 게임이론의 대표선수 격이다. ‘딜레마 게임’의 함의는 인간이란 결코 이기심을 넘어설 수 없는 가녀린 존재라는 철학적 성찰이 아니다. 오히려 이기심에 입각한 선택이 합리적 행동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의 삶을 뒷받침하는 소묘이다.
지진과 쓰나미 이후 일본 동부 해안지역에서도 일종의 ‘딜레마 게임’이 발생했다. 내가 절도 있게 행동하고, 상대도 그렇게 한다면, 그래서 전체 차원에서 절도가 관철된다면 재앙의 절대곤궁 국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덜 힘들게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그렇게 행동했다. 내일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에서 꼭 필요한 만큼의 물품만 사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세계인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사재기와 약탈이 없었고, 과도한 슬픔의 배설이 없었다.
‘딜레마 게임’에서 게임 참여자가 승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불신이다. 일본 동부해안 주민들이 처한 환경은 게임에서 제시된 구조와 비슷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결핍된 형편에서 상대가 나처럼 절제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 게 필요했다. 이 게임은 어느 한 쪽에서 ‘배신’하면 한 순간에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균형점 위에서 이뤄졌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게임’에서 승리했다.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공동체의식이니 국격이니 하는 이야기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이기심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기적적인 일이 가능했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단순한 개인적 믿음이나 신념이 아닌 사회 차원에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잘 형성돼 있었기에 게임에서 이기지 않았을까. 신뢰야말로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다. 이번에 우리는 사회적 자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현실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다. 또한 사회적 자본의 가치를 현실에서 제대로 측정할 기회를 얻었다. 도로 항만 전기 등 모든 사회간접자본이 사라진 그곳에 만일 사회적 자본이 그 정도 수준으로 축적돼 있지 않았다면 일본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 비용을 역으로 계산하면 사회적 자본의 가치이다.
‘일본침몰’ 운운하는 품위 없는 접근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낮은 국격을 거론하고 우리 국민들의 미욱한 시민문화를 예단해서 무작정 비판하는 관점 또한 적절하지 않다. 도래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스스로를 비하할 이유는 없다. 설령 만일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저급한 시민의식으로 매도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자본이 무너졌기 때문으로 바라보는 게 더 합당해 보인다.
신뢰와 소통이 바탕이 된 공동체 의식. 만일 그런 게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다면 그게 모두 국민들 탓이란 말인가. 누가 사회적 자본을 무너뜨렸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혹시 대한민국에 지진과 쓰나미보다 더한 게 이미 휩쓸고 갔는데 우리가 못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작 복구가 더 절실한 땅은 일본보다 우리 땅인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참담한 화보를 보게 되면 의식의 사치라는 부끄러움에 반성하게 된다.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소장/eriss.tistory.com
(웹場 http://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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