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不知不慍 不亦君子乎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다. 뭐 이렇게 쉬운 말이 <논어>라는 고전의 서두에 올라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이를 먹어도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걸 곧 알게 된다.
‘알아달라’는 욕구는 사실 인간에게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것이다. 부부 생활과 관련된 우스개 소리로 “니는 밥만 묵고 사나?”는 성에 관한 담론이라기보다는 소통에 관한 담론이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꼭 신 앞에 단독으로 선, 진공에 도달한 누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가끔은 ‘나와 너’이고 싶다.
세상과 내가 분리되면서 그렇지만 ‘나와 너’의 공간은 한없이 위축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그것’들로만 구성되는 것이라고 변명하며 위축을 받아들인다.
최고은이란 한 인간(人間)의 공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냥 ‘나’의 절해고도가 아니었을까. 병마와 추위, 그리고 배고픔에 서서히 죽어갔을 예민한 정신을 가진 한 인간의 죽음.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블랙홀에서 일어난 것 같은 그저 완벽한 소멸에 가깝다.
"그 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그가 남겼다는 ‘쪽지유서’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할 말을 잊는다. 그렇게 벌써 나와 최고은의 소통은 단절된 것이다. “문 좀 두들겨 달라.”는 배고픔보다 더 절절하게 내민 손길이 그의 작은 공간에서 가늘게 떨리다 바닥으로 떨어졌을 순간을 상상하면 우리 사회와 우리 문명의 야만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문 좀 두들겨 달라”는 ‘알아달라’는 소통의 요청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 요청은 죽음 이후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블랙홀 같은 고립에서 어떠한 종류의 소통에서도 배제된 채 그가 잦아들 때까지, 나를 포함하여 어떠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많은 이들이 이제 그를 ‘알아주고’ 있다.
정말 창피한 것은 그가 아니라, 우리다. 나를 우리를 창피하게 만든 사실 자체보다도 창피하다는 인식이 더 창피하다. ‘나’밖의 모든 것을 ‘그것’으로 치환하여 결국 그의 죽음 또한 하나의 물(物)로 귀결케 한 이 총체적 고립.
그리고 “나를 알아달라”며 구두를 벗어 던지고 가방을 내 던진 어느 시의회 의원. 그의 참으로 절절한 소통욕구가 최고은의 죽음과 교묘하게 겹쳐지는 시린 겨울날이다.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소장/eriss.tistory.com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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