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는 아니었지만 기자로 생활하다 보면 부음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거의 모든 부음은 단순하다. 언제 누가 사망했으며 장례식장이 어디며 발인이 언제인지 정도이다. ‘누구’보다 ‘누구’의 아들딸이 더 유명하면 아무개의 부친상으로 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누구’의 별세라고 쓴다.
가끔 기사체로 부음이 나갈 때는 살아생전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개인적으로 쓴 부음 중에는 신자유주의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이 기억난다. 국제부에서 국제경제를 담당할 때였다.
찾아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썼는지 지금에서야 생각나지 않지만 개인적인 성향 상 좋게 썼을 터이다. 어린아이들이 싸울 때 코피가 나면 모든 게 종료되듯 인간사의 영욕 또한 개인의 죽음과 함께 일단은 묻어두는 게 우리 정서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적어도 부음을 쓸 때는 솔직히 ‘기자정신’에 투철해지지 못했다. 꼭 초상집에 불 지르는 것 같아서이다. (다른 상황에서는 그럼 투철했는가 하고 묻지는 마시길.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니.)
어느 기업인이 죽었을 때 다른 기자가 작성한 부음에서 살아서 그의 오욕을 적시한 것을 보고 약간 당황한 기억이 있다. ‘꼭 망자의 관 뒤로 고춧가루를 뿌려야 할까’하는 생각이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어떤 순간에도 엄정해야 한다는 ‘기자정신’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정서는 대체로 엄정함보다는 관대함에 가깝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서거로 표현하지 않은 어느 일간지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나아가 죽음 중에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인정(認定)’의 기류가 훨씬 더 강해진다. 죽음으로 결백을 호소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비장함에 대해서 우리네는 더 애틋하고 애절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죽어서 누워 있는 망자에 대해서도 그가 역사적인 개인이라면 죽음 이후에 엄정한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죽음을 서거로 받아들이든, 별세로 받아들이든 이제는 개인의 자유다. 예의가 존중돼야 하는 시점에서는 망자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금도이지만, 일각에서 주장한 대로 “자살이 무슨 서거냐”라고 말하고 싶다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쯤은 그렇게 말하면 된다. 또 어느 노인이 노 전 대통령 묘역에서 뿌린 유인물에 적힌 내용대로 “노 전 대통령이 전교조·전공노·민주노총 등 민주세력을 가장한 친북좌파 세력을 도와 청소년들을 세뇌시켰으며,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국가 정체성을 혼돈에 빠뜨렸다”고 주장해도, 자유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묘소에 똥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행위를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삼척동자도 안다. 백번 양보해서 묘소 앞에 서서 노 전 대통령을 욕할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죽어서 누워있는 망자를 욕보이는 짓은 자살한 그를 다시 한 번 타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한 존중은 그가 무기물로, 자연으로 회귀하기 전까지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 즉 인간이었음을 기억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죽음 이후에 더 존중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배고픈 사자는 사냥감이 마땅치 않으면 사냥 중에 다쳐서 사망한 동료 사자를 뜯어 먹는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분뇨를 끼얹는 행위가, 배고픔에 동족을 잡아먹는 행위와 크게 다른 것인가. 무덤의 주인이 아버지의 원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약간 정신이 안 계신’ 노인들의 일탈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그 행위의 의미가 너무 크고, 우리 사회 병리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많은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인은 참 관대하다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분은 건강이 안 좋다고 들었다.)이 멀쩡히 노년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 한 이야기다.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학살을 저지른 ‘수괴’들인데 희생자 가족이나 정의로운 청년이 분연이 일어나 사적으로 징벌하지 않았음을 거론한 것이다. 학살 만행에 대해서까지도 우리 사회는 관대했다. 그래서 한(恨)이라는 정서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안으로 삭히고 말다보니 가슴 속에 응어리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비록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기는 했지만 전 전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는 행사까지 개최됐다.
그런 관대함이 왜 봉하마을에서는 ‘극악한 엄정함’으로 비화한 것일까.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고, 전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던진 노 전 대통령을 노무현씨, 혹은 더 못한 호칭으로 부르고 욕한다 해도, 그것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술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위라면 그것도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활기찬 노년을 맞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님과 달리 차디찬 땅 밑에 누워 있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인분세례를 받아야 하는 세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맥 빠지는 결론. 우리 조상들은 이 같은 이해불능을 문학으로 승화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청산별곡의 한 장이 대표적이다.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사미 짐대예 올아셔
奚琴(해금)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대(大)문학의 시대’나 기대하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나야 할까나.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소장/eriss.tistory.com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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